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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신문"(으)로   54개의 도서가 검색 되었습니다.
근현대사신문: 현대편

근현대사신문: 현대편

강응천, 김형규, 강양구  | 사계절
10,350원  | 20100129  | 9788958284383
한국 근현대사를 신문의 형식으로 구성해 보다 생생하게 읽는다! 과거의 역사를 신문의 형식으로 접근한 역사서로, 신문 형식으로 보는 역사 시리즈의 완결편 『근현대사신문』의 현대편. 과거의 역사를 그 시대의 신문처럼 재현하기 위해 사진, 광고, 신문기사 등 생생한 당시 자료를 수집하고 수록하였다. '근대편'과 '현대편' 두 권으로 구성된 『근현대사신문』의 현대편에서는 1945년 해방부터 2003년 현대 한국까지 이어지는 질풍과 노도의 시대를 다룬다. 한국 근현대사를 시종일관 세계화의 흐름과 함께 조명했으며, 한국과 세계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실었다. 이를 통해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며 그 소용돌이에 맞서 온 한국인의 발자취를 재발견할 수 있다.
근현대사신문: 근대편

근현대사신문: 근대편

강응천, 김성환  | 사계절
10,350원  | 20100129  | 9788958284376
한국 근현대사를 신문의 형식으로 구성해 보다 생생하게 읽는다! 과거의 역사를 신문의 형식으로 접근한 역사서로, 신문 형식으로 보는 역사 시리즈의 완결편 『근현대사신문』의 근대편. 과거의 역사를 그 시대의 신문처럼 재현하기 위해 사진, 광고, 신문기사 등 생생한 당시 자료를 수집하고 수록하였다. '근대편'과 '현대편' 두 권으로 구성된 『근현대사신문』의 근대편에서는 1876년 개항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이어지는 비극의 시대를 다룬다. 한국 근현대사를 시종일관 세계화의 흐름과 함께 조명했으며, 한국과 세계에서 동시에 펼쳐지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실었다. 이를 통해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며 그 소용돌이에 맞서 온 한국인의 발자취를 재발견할 수 있다.
대한유사 (독립신문보다 생생하고 혈의 누보다 파란만장한 진짜 근현대사 이야기)

대한유사 (독립신문보다 생생하고 혈의 누보다 파란만장한 진짜 근현대사 이야기)

박영수  | 살림FRIENDS
10,800원  | 20110729  | 9788952215987
독립신문보다 생생하고 혈의 누보다 파란만장한 진짜 근현대사 이야기『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 이 책은 역사와 함께 그 시대의 문화와 풍속을 함께 전달한다. 매국노에게 호통친 하녀부터 담뱃값을 모아 국채를 갚으려던 서민까지 뒤틀린 시대를 살았던 민초들의 기상천외한 뒷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100년 전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한국현대사와 함께한 방우영의 신문 만들기 55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한국현대사와 함께한 방우영의 신문 만들기 55년)

방우영  | 김영사
13,500원  | 20080111  | 9788934927945
연세대 재단이사장,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 등을 맡고 있는 방우영 현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조선일보 제호만 빼고 다 바꾸자’ ‘화려한 편집과 특종만이 살 길이다’라며 과감한 혁신을 추진, 4등 신문을 대한민국 1등 신문으로 탈바꿈시킨 신문 혁신과 생존전략, 자신이 겪은 역사적인 에피소드등을 다루고 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쳐 윤전기를 멈춰 세운 선우휘.이영희 필화사건, 한 줄의 기사로 촉발된 평민당의 ‘전쟁’, 하루 25시를 살며 치열한 토론과 논쟁으로 신문 지면을 펄펄 끓게 만든 열정의 신문쟁이들, 인간적인 내면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내가 본 대통령들’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효자동 청운각 청진동 장원 등 세상을 요리한 당대 최고의 요정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정치야화까지 실고 있어 '아침이 두려웠다' 고백하는 노 언론경영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파노라마 (신문 잡보를 통해 본 근대 초기)

한국사회의 파노라마 (신문 잡보를 통해 본 근대 초기)

강현조  | 소명출판
14,400원  | 20231110  | 9791159058387
근대 초기 신문에 대한 기존 독법의 반성 우리가 흔히 개화기, 근대여명기, 근대계몽기 등으로 호명해 온 1876~1910년까지의 기간은 그 이전의 시기, 즉 전근대와 확연하게 다른 시대로 진입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제도와 사상, 그리고 운동이 혼재하면서도 공존한 시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시기 현실의 총체적 면모를 고찰하고자 할 때, 그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대표적이고 유용한 자료에 해당하는 것이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 초기 신문은 이 시기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조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접근의 중요한 전거로 활용되어 왔다. 다만 실제에 있어 근대 초기 매체의 일부만이 한정적으로 선택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가 마치 전체인 것처럼 다뤄져 왔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러한 관행은 일정한 타당성이 있고, 때문에 어느 정도 보편적인 동의와 인정을 받아오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 초기 매체의 지면에서 가장 많은 분량과 편폭을 차지하는 것은 논설도, 소설도 아닌 잡보였다.
대한매일신보 세트(영인본)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세트(영인본)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국문판)

베델  | 한국학자료원
1,620,000원  | 20230606  | 9791168873346
서울 전동에서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하여 190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 국문판 한(韓)·영(英) 양국어로 된 신문으로,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磚洞: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서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 성명은 배설(裵說)]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梁起鐸)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주필에는 박은식(朴殷植)이 활약하였고, 그 밖에 신채호(申采浩)·최익(崔益)·장달선(張達善)·황희성(黃犧性) 등이 필진으로, 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 등이 경영에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위기일로의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국가보존의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창간된 것으로 고종의 은밀한 보조를 비롯,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그 체재는 종전의 것보다 큰 세로 40㎝, 가로 27㎝로서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으로 국문 2면, 영문 4면이었다. 이러한 편집형태를 취한 것은 긴급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일간신문이 필요하였고, 영국인과 합작한 한영합판(韓英合辦)의 조직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인을 내세운 이유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불법주둔하면서 전쟁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강행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검열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은 당시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로 신문을 발행하는 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창간 이듬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다시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시켜 따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만들었고, 영문판은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라 하였는데 대내외에 많은 구독자를 얻었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하여 1907년 5월 23일 순한글판 『대한매일신문』을 새로 창간하여 결국 국한문판·영문판·순한글판 등 세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고 발행부수도 1만 부를 넘었다. 이처럼 이 신문이 발전된 것은 일본군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라는 것과 그 보도와 논평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것이라는 데 연유하였다.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우리의 의병에 대하여 사전검열에서는 이를 비도(匪徒) 혹은 폭도(暴徒)로 표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계의 세 신문은 한결같이 사실 그대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였다. 이와 같은 보도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한 연설장에서 “……한국 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다.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인(韓人)을 감동하게 하는 힘이 매우 크다. 그 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속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 통감부 당국은 회유와 매수작전 등 갖가지 수법으로 그 논조를 꺾으려 하였으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신문지법(新聞紙法)」을 일부 고쳐 내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과 외국에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 등을 압수 및 판매금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이어 베델(배설)과 양기탁을 구속 또는 국외로 추방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첫번째로 1907년 10월 9일 주한 영국총영사 코크번(Cockburn)에게 베델(배설)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는데, 그들은 국한문판 및 영문판의 9월 3·12·21·26일자, 한글판 9월 18일자, 10월 1·8일자 등의 기사가 공중평화를 해치고 인민으로 하여금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1908년 5월 27일 영국 상해고등법원 검사 윌킨슨(Wilkinson, H. P.)과 연서(連書)로써 베델(배설)을 제소하였다. 이번에도 국한문판 1908년 4월 17·29일자, 5월 16일자의 논설이 우리나라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폭동을 격려하고 우리나라 정부와 인민 간에 원수되는 뜻을 격동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6월 15일부터 3일간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공판에서 논설은 양기탁이 집필한 것이며, 베델(배설)은 그 전권을 양기탁에게 맡기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나, 재판장 보온(Bourne, F.S.A.)은 베델(배설)에게 제1종 경벌죄의 유죄를 선고하였다. 세번째로 1908년 같은 해 7월 12일 밤 돌연 양기탁이 구속기소되었다. 영국총영사 코크번은 양기탁의 즉시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통감부는 구속이 아니라 잠시 유치(留置)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리고 양기탁에게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 사취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기소하였다. 그러나 전후 5차에 걸친 공판 끝에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석방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싸우던 과정에서 베델(배설)이 물러나고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万咸, Marnham, A. W.)이 사장이 되었는데, 1910년 6월 14일 만함은 갑자기 판권 일체를 전 사원이었던 이장훈(李章薰)에게 금 4만 원에 매도하고 우리나라를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6월 14일자(1408호)부터 이장훈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양기탁은 각 신문에 광고를 내어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뜻대로 통감부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8월 28일까지(1461호) 발행되다가 경술국치 다음날부터 ‘대한(大韓)’의 두 자를 떼어낸 채 『매일신보』가 되어 총독부기관지로 바뀌었다. 『매일신보』는 1945년 11월 10일 정간 처분이 내려졌고, 이후 『서울신문』이란 이름으로 변경해 1945년 11월 23일자 석간부터 속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손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당시 일본의 언론탄압 속에서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동아일보(영인본)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 신문의 압수기사를 일어로 번역하여 1932년에 발행한 종합서 - 영인본)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동아일보(영인본)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 신문의 압수기사를 일어로 번역하여 1932년에 발행한 종합서 - 영인본)

조선총독부  | 한국학자료원
135,000원  | 20230430  | 9791168872738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 신문의 압수기사를 일어로 번역하여 1932년에 발행한 종합서 경무국 도서과에서는 1920년에 민간지가 발행되기 시작한 이후 일제하의 3개 민간 신문인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를 철저히 검열하여 삭제 또는 압수한 기사를 보관하였다가 10년의 분량을 모아 일어로 번역하여 동아일보(조사자료 제29집), 조선일보(조사자료 제30집), 시대일보·중외일보(조사자료 제31집)를 3권의 책으로 만들어 1932년에 발행하였다. 서문에서 “조선에서 발행되는 언문신문의 논조를 조사하면 조선 통치상 가장 좋은[好適] 참고자료가 되며, 조선과 조선 민족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고 적고 있다. 이 자료는 표지에 ‘비(秘)’ 표시를 하여 특정한 사람만이 열람하였으므로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광복 후 20년이 지난 1960년대가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더욱 강력한 군국주의 체제로 되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체계화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언론의 논조가 1920년대보다 한층 위축되었다. 언론탄압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30년대에는 기사가 압수 당하는 건수가 훨씬 줄어들었다. 총독부는 1932년에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 3책을 발행한 후 1931년부터 1932년까지 2년간의 압수기사를 묶은 비밀자료를 또 한 권 발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37년 5월에는 또 한 권의 ≪언문신문차압기사집록≫을 편찬하였다. 이 자료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4년간 3개 민간지의 압수기사를 한 권에 묶은 것으로 압수기사집록은 세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3개 신문의 기사 4년치를 합쳐도 74쪽의 작은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언문신문 차압기사 집록≫의 발행상황은 다음과 같다. 제1차는 1920년부터 1930년까지의 압수기사로 ≪동아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29집:1932년 9월 발행) 574쪽, ≪조선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30집:1932년 12월 발행) 512쪽, ≪시대일보·중외일보≫(총독부 조사자료 제31집:1932년 6월 발행) 311쪽으로 발행되었다. 제2차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의 압수기사를 한 책으로 묶어 발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제3차는 1933년부터 1936년 사이의 3개 신문 압수기사를 한 책에 1937년 5월에 묶어서 74쪽으로 발행되었다. 압수기사집록은 일제하 민간신문의 항일논조를 연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중요 자료가 된다. 민족 언론사의 관점에서는 항일 언론 투쟁의 실상이 축약되어 있는 것이며, 언론을 탄압한 총독부의 언론정책은 물론이고 조선 통치의 방침까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압수 기사 가운데는 신문이 정간 당한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도 있고, 집필자가 사법처분에 회부되어 형무소살이까지 하게 되었던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압수처분으로 그친 기사라 하더라도 압수건수가 누적되면 일제는 더욱 강력한 탄압을 가하였다. 이 자료의 존재가 알려지자 1972년에는 국내의 민간업자가 영인 출판하였다. 1990년에는 일본의 코리아연구소에서 ‘消された言論(사라진 언론)’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하여 정치편·사회편으로 나누어 2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는 ≪시대일보≫·≪중외일보≫의 압수 기사는 수록되지 않았다. 1998년에는 ‘일제하 민족언론 압수기사 모음’이라는 제목으로 압수기사의 원문을 다시 찾아 보도기사, 논설-논평기사, 기명기사·기타의 3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LG상남언론재단에서 출판하였다.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보 번역집 1 : 사회·문화·산업편 (일제강점기 일본어 신문)

조선시보 번역집 1 : 사회·문화·산업편 (일제강점기 일본어 신문)

류민화 옮김  | 소명출판
27,000원  | 20230610  | 9791159057014
100년 전 부산을 비롯한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양상을 살피다 신문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가장 보편적인 자료이다. 일본어신문 『조선시보』는 1894년 11월 21일부터 1940년 8월 31일까지 약 46년간 부산에서 간행되었다. 『조선시보』의 초기 자료는 실전된 상태이지만, 1914년 11월 2일부터 1940년 8월 31일까지의 원문 자료가 부산시립시민도서관 고문헌실에 소장되어 있으며,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시보』는 근대 신문의 초기 자료로 그 가치가 크며, 당시의 부산을 비롯한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사회양상을 알 수 있는 유의한 자료이다. 본서는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조선시보』에서 선별하여, 사회와 생활, 문화와 풍속, 산업과 경제, 기획기사로 분류하여 전체 89개의 기사를 번역하였다. 이들 기사의 대부분은 사실 기사와 함께 인터뷰기사, 일본인의 시각에서 본 기획기사이다. 약 100년 전 조선의 사회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근대 조선사회의 모습을 재조명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조선시보 번역집 2 : 교육편 (일제강점기 일본어 신문)

조선시보 번역집 2 : 교육편 (일제강점기 일본어 신문)

조강희 옮김  | 소명출판
19,800원  | 20230610  | 9791159057021
일본인을 위한 일본어신문이 부산에서 발행되다 『조선시보』는 1894년 11월 21일부터 1940년 8월 31일까지 46년간에 걸쳐서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어신문이다. 부산은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같은 해에 개항하게 된다. 이후 1880년에 원산, 1883년에는 인천이 개항하였다. 청일전쟁과 그 후의 러일전쟁의 승전은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의 경제활동을 견고히 하였다. 강화도 조약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와 같은 보호 아래 정부관리, 언론인, 상인 등이 줄지어 내한하여,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에 많은 일본인들이 체류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상업이나 무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전황 보도와 급격히 늘어난 일본인의 상업 활동을 보도할 목적으로 일본인에 의해 신문이 많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문의 독자층은 일본인이었으며 대부분 상업 활동을 보도하는 상업신문으로 발간하였다. 부산에서도 부산과 인근의 상업 활동을 하는 일본인들의 근황을 보도할 목적으로 1892년 7월 11일에 일본어 신문인 『부산상황』이 발간되었다. 그 후 재정악화로 제호를 『동아무역신문』으로 바꾸는 등 활로를 모색하였지만 2년 후 휴간을 하게 된다. 이것을 1894년 7월 『한성신문』 사장인 아다치겐죠가 중심이 되고 재부산일본총영사인 무로타 요시후미,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인 사카키바라 시게오 등이 지원하여 1894년 11월에 『조선시보』라는 이름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재발행하였다. 이 신문은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마산, 진주, 진해, 대구 등지에도 지국을 설치하였다. 이후 1941년에 통감부가 『남선일보』와 『조선시보』를 『부산일보』에 통합시킴으로써 폐간하게 된다. 『조선시보』도 타 신문들과 같이 일정 부분 일본의 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는 기관지의 성격도 띄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보』 기사에 대한 조사와 분석은 당시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상업활동을 한 실태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정책의 실태와 변화 등을 엿볼 수 있다. 꾸준하게 게재되는 광고를 통해서도 병원, 신약, 잡화 등 근대 상업의 변모와 물가나 소비형태 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를 통해 당시 교육 정책을 살피다 본 번역 해제집은 『조선시보』 기사 중 ‘교육’ 관련 기사에서 선별한 것이다. 교육 관련 기사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교육정책의 변화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교육정책에 대한 실태와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해제집의 편집은 『조선시보』 기사 중에서 교육 관련 기사를 모아서 목록을 제시하고, 중요한 기사 몇 개를 번역하여 모은 것이다. 교육관련 기사도 ‘조선교육’, ‘여성교육’, ‘식민지교육’, ‘공업교육’ 등 분야별로 분류하여 게재하였다.
조선시보 번역집 3: 문예, 운문편 (일제강점기 일본어 신문)

조선시보 번역집 3: 문예, 운문편 (일제강점기 일본어 신문)

김임숙  | 소명출판
16,200원  | 20230610  | 9791159057038
일제강점기 부산의 언론을 주도하다 『조선시보』는 1894년 부산에서 발간된 일본어민간신문으로, 『부산일보』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부산지역 언론을 주도하였다. 『부산상황』이라는 창간 당시의 제호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보』는 종합 일간지인 동시에 상업 경제지의 성격이 강한 신문이다. 부산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1890년대부터 수많은 일본인이 이주해 와서 살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선시보』는 부산에 거류했던 일본인에게 조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동시에 조선에는 언론을 통한 식민정책을 펼쳐나갔던 일간지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문화 보급에 사용된 일본 전통시가를 살피다 이러한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시보』는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에 일본문화의 보급과 확산에도 주력하게 되는데, 문예란에는 소설, 강담 등의 산문과 더불어 단카, 하이쿠, 센류, 도도이쓰 4구로 구성되어있으며, 내용은 주로 남녀 간의 애정에 관한 것임 등의 일본 전통시가를 다수 싣고 있다. 『조선시보』 는 1892년 7월 11일에 창간되었지만 보존된 지면은 1914년 11월 2일부터 1940년 8월 31일까지로, 초기에는 결호도 간혹 보인다. 문예란에 대해 살펴보면, 주로 1면과 4면에 소설, 강담 등의 산문이 실려 있으며, 단카, 하이쿠, 센류, 도도이쓰 등의 일본 전통시가는 대부분이 1면에 실려 있으며, 드물게 3면이나 4면 등에 실려 있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보』의 일본전통시가란에 보이는 지역으로는 부산동래, 마산, 김해, 울산방어진, 의령, 밀양, 통영, 거창, 대구 등의 경상도권이 대부분이며, 경성, 용산, 원산, 평양, 함흥 등의 중북부지역과 오사카, 도쿄오차노미즈, 사도 등의 일본지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선전역과 일본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의 독자층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조선시보』 발행 초기인 1910~1920년대의 문학담론에서는 ‘국민의 시가문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조선시보』 편집부는 일본문학 중에서도 전통시가의 보급과 확산에 주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보』 1면에는 다양한 장르의 일본 전통시가문학이 실려 있는데, 이는 당시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문화적 욕구충족과 타지에서의 향수를 달래려는 목적과 더불어 조선인에게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신문사 주최로 하는 대회를 통해 일본 고전시가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목적 또한 있었으리라고 본다.
한성신보가 기획한 근대 한국의 표상 (일제관변신문은 한국근대사를 어떻게 왜곡·은폐·조작했는가?)

한성신보가 기획한 근대 한국의 표상 (일제관변신문은 한국근대사를 어떻게 왜곡·은폐·조작했는가?)

장영숙  | 역사공간
17,010원  | 20230228  | 9791157076017
한성신보는 개화기 조선을 의도적인 방향으로 표상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을 위한 전위적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언론이었다. 이 책은 한성신보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비롯한 근대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축소, 왜곡, 과장 보도하면서 한국을 하등국가로 몰아갔는지를 면밀히 살핀다. 한성신보는 일본 정부의 외교적 입장과 군사 정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조선에 관철시키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일본인 국권론자들에 의해 창간된 한성신보는 조선 내 여론을 선도하고 친일적 정치 세력을 양성하여 침략의 경로를 쉽게 하고, 일본의 대조선 침략 정책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면을 활용했다. 개화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주요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한 사실 왜곡이 신보 안에서 자행되었고, 조선에 대한 후진적인 이미지를 조성하며 조선 정치·사회 무대의 핵심 인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파했다. 신보는 고종과 명성황후, 대원군에 대한 이미지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했다. 그 결과 고종은 리더십이 약하고 존재감 없는 무능한 군주로, 명성황후는 무속에 빠진 타락하고 부도덕한 인물이면서 집안을 망친 암탉으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반면, 일본은 하등국인 조선을 보호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모범국가이자 문명국으로 표현되었다. 조선 개항에서 일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조명하거나 일본 정부의 불법 사건을 축소·은폐하는 등으로 한성신보는 조선의 문명화를 이끌어준 주체자, 시혜를 베풀어준 은혜로운 국가라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일본의 개입에 대한 정당성을 홍보하는 셈이었다. 한성신보는 일본 정부의 의도에 맞춰 여론을 형성해나가면서 이미지 정치에 앞장서는 도구적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근대 정치 무대의 주역이었던 고종과 명성황후, 대원군에 대한 악의적 이미지 표상화 작업은 일본인들에게는 자국의 우월한 정치 문화와 문화적 수준 차이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준 반면, 조선인들에게는 상대적 열패감을 안겨주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 인민의 불만을 정부로 향하게 하고, 정부에 대한 신뢰보다는 실망의 깊이를 더하게 함으로써 내적 균열과 분열을 유도했다. 한성신보가 만든 조선 왕실의 표상은 지금까지도 일정 부분 고착되어 있고, 그로 인한 정신적 폐해 또한 깊이 남아 있다. 이 책은 한성신보가 당대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담아내고 있었는지를 추적하며 관찰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조선 침략의 야욕을 호도하는 데 언론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그 어두운 그림자를 조명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즘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도구의 선봉이 되는지를 오늘날의 흐름과 관련해 그려볼 수 있게 한다.
고려시보 (1933년에 경기도 개성에서 발간된 지방신문 - 영인본)

고려시보 (1933년에 경기도 개성에서 발간된 지방신문 - 영인본)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270,000원  | 20230315  | 9791168872530
1933년에 경기도 개성에서 발간된 지방신문 - 영인본 고려시보(高麗時報)는 1933년 4월 15일 경기도 개성에서 발간된 지방신문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된 1941년 4월 16일까지 거의 매월 2회 발간되었다. 당시에 유명했던 중앙일간지에 버금가는, 개성과 그 근교일대는 물론 황해도 등까지도 널리 보급되었던 신문이다. 해방이 되자 즉시 속간하여 6.25 전쟁 전까지 개성에서 계속 발간되었다.
제국신문과 근대 (매체 담론 감성)

제국신문과 근대 (매체 담론 감성)

김복순  | 현실문화
27,000원  | 20141015  | 9788965641049
[제국신문과 근대]는 지금까지 ≪제국신문≫에 관해 발표된 연구 논문 중에서 중요한 글 13편을 추려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제국신문≫은 1898년 8월 10일 창간되어 1910년 3월 31일까지 12년 동안 약 3,240호 정도를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총 13편의 논문을 매체, 담론, 감성이라는 세 가지 범주 아래 나눠 실었다. 부녀자를 비롯한 당대의 약자들이 필자나 독자로 활발히 참여했던 점, ‘정치개량보다 풍속개량’을 강조하며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 등과 차별을 두었던 논설의 기조, 기생ㆍ첩ㆍ소사ㆍ노인ㆍ의녀ㆍ유학생 등으로 자신을 밝힌 다양한 필자가 참여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 등을 확인하고 분석하였다.
제국신문 미공개 논설 자료집 (1907.5.17-1909.2.28)

제국신문 미공개 논설 자료집 (1907.5.17-1909.2.28)

강현조, 권두연, 김기란, 김복순, 란미  | 현실문화
43,200원  | 20141015  | 9788965641025
[제국신문 미공개 논설 자료집]은 지금까지 미공개 상태에 있던 1907년 5월 17일부터 1909년 2월 28일까지의 ≪제국신문≫ 발행분에 게재되었던 논설 전문(全文)을 8명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교열·편찬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의 제국신문은 연세대학교 국학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 유일한데, 이 자료집은 이 판본을 바탕으로 2년여의 노력 끝에 논설과 기서, 별보 등의 원문을 판독해 책으로 엮었다.
백 투 더 1919 (신문기자, 100년 전으로 가다)

백 투 더 1919 (신문기자, 100년 전으로 가다)

오승훈  | 철수와영희
16,200원  | 20200411  | 9791188215423
식민지 조선인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까? - 10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이 책은 100년 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가상의 ‘지하신문’을 통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게 알려 준다. 생동감 있는 1919년사의 복원을 통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올바르게 담고 계승하려는 시도다. 마치 시간여행을 떠난 것처럼 느껴지는 기사 형식의 구성을 통해 1919년 당시 민중과 독립운동가부터 친일파, 지배자인 일본인까지 당시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담았다. 독립운동사와 함께 국제 정세는 물론 사회문화상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룬 기사들은 당시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10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지, 그들이 꿈꾼 자유와 평등으로부터 지금의 한국은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 살펴 볼 수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는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3·1운동을 1919년 3월 1일 하루 동안 서울과 일부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시위 정도로 알고 있다.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이리저리 피난살이를 다녔던 망명정부에 불과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3·1운동은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참여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독립을 ‘청원’하지 않고 독립을 ‘선언’했다. 남녀노소에서 장삼이사까지, 기독교에서 천도교, 불교까지 온 민족이 한목소리로 조선 독립을 외쳤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더는 용인할 수 없다는 각성은 조선인 스스로 자유인의 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를 통해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범을 불러왔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는 왕실과 귀족이 엄존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엄연한 신분 사회였는데, 한 사람만을 위한 왕정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공화정을 외친 100년 전의 목소리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2019년 1월 1일부터 4월 29일까지 ‘1919 한겨레’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기사들을 묶었다. 1919년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 당시 〈매일신보〉, 법원 판결문, 검찰 심문조서와 같은 1차 사료를 비롯해 100여 편의 관련 논문, 50여 종의 연구서 등을 두루 참고했으며 전문가 20여 명의 자문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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